1908년 1월 민족자강을 위한 교육계몽운동을 목적으로 발기인 정영택(鄭永澤)을 비롯, 기호인사 105명이 서울 신문로의 보성소학교(普成小學校)에서 창립총회를 열었다. 회칙에서 “본회는 경기도 및 충청남북도에 흥학하기로 목적함(제2조). 전조의 목적을 관철하기 위하여 학업을 권장하며 회보를 간행하여 일반인사에게 지식을 주입하며, 경기도 및 충청남북도 각 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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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년 1월 민족자강을 위한 교육계몽운동을 목적으로 발기인 정영택(鄭永澤)을 비롯, 기호인사 105명이 서울 신문로의 보성소학교(普成小學校)에서 창립총회를 열었다. 회칙에서 “본회는 경기도 및 충청남북도에 흥학하기로 목적함(제2조). 전조의 목적을 관철하기 위하여 학업을 권장하며 회보를 간행하여 일반인사에게 지식을 주입하며, 경기도 및 충청남북도 각 군에 교육을 발전하게 함(제3조).”이라고 목적을 규정하고 있다. 이처럼 표면적으로는 교육진흥을 강조했지만, 근본 목적은 물론 독립·애국사상의 고취에 있었다. 회보로 『기호흥학회월보』를 발간하였다. 발행인은 김규동(金奎東), 편집인은 이해조(李海朝)이다. 1909년 7월까지 월간·국판으로 통권 12호를 발간했으나, 내용이 국권 회복에 관계된다 하여 제6·9·10·11호 등이 여러 번 압수되기도 하였다. 창간호에는 의친왕의 ‘咸與維新(함여유신)’이라는 친필을 실었다. 1910년 9월 일본에 의해 강제 해산되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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