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계』는 1915년 봄에 등사판 소식지 형태로 출발했다가 1917년 6월 당국의 인가를 받아 활판인쇄물로서 정식 창간되었다. 창간호는 유실되어 전모를 알 수 없지만 『학지광』의 관련 기사와 『여자계』 2호에 실린 각종 사고(社告)를 통해, 평양 숭의여자중학교 동창회 잡지부원들이 『여자계』 인가를 직접 받아 창간했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여자계』는 제2호부터 동경여자유학생친목회의 기관지가 된다. 동경여자유학생친목회는 1915년 4월 3일 김숙경, 김정화, 김필례, 최숙자 등에 의해 결성되었다. 초대 회장 김필례가 귀국하여 정신여학교 교원으로 재직하게 되자, 1917년 10월 17일 개최된 임시총회에서 회장 김마리아, 총무 나혜석, 서기 정자영, 부서기 김충의, 회계 현덕신으로 재정비된다. 이 임시총회에서 『여자계』 편집사무를 동경여자유학생친목회에서 주간하기로 만장일치로 결정되어, 편집부장 김덕성, 편집부원 허영숙, 황애시덕, 나혜석, 편집찬조 전영택, 이광수가 피선되었다.
현재 실물이 확인되는 『여자계』는 2호(1918.3.22), 3호(1918.9.10), 4호(1920.3.25), 5호(1920.6.25), 6호(1921.1.11), 속간4호(1927.1.17)이다. 『여자계』 편집부는 『학지광』 22호에 7호 목차 광고를 내보냈지만 발간 여부는 확인되지 않는다. 연4회의 계간지로 기획했으나 지켜지지 못했다. 여기에 소개하는 2호의 편집겸발행인은 김덕성(金德成), 인쇄인은 오리사카 도모유키(折坂友之), 인쇄소는 횡빈의 복음인쇄주식회사, 발행소는 동경 여자계사, 정가는 창간호보다 3전이 오른 18전(우세2전)이다. 6호는 편집겸발행인이 여자학흥회 회장 유영준(劉英俊)으로 바뀌었고, 여자계사의 동경 주소도 변경되었다. 6호에서는 판매소를 경성 광익서관, 블라디보스토크(浦潮斯德) 윤능효서관, 평양 광명서관으로 명시해 놓았고 정가도 창간호보다 20전 비싼 35전으로 올랐다.
『여자계』 편집부는 언론, 수양, 학술, 가정, 문예, 전기 등의 분류로 원고를 청탁, 모집했다. 2호의 주요 필진으로는 전영택, 이광수, 최남선, 염상섭, 나혜석, 김명순, 김덕성, 박순애 등이 있다. 김명순의 「초몽」과 나혜석의 「경희」가 실려 있다. 6호의 주요 필진으로는 이양전, 현덕신, 황석우 등이 있다. 소식란 「그리스마스 及 忘年會」에는 동경여자유학생친목회 산하 단체로서 4호부터 『여자계』 발행을 주도했던 여자학흥회 임원 명단이 실려 있다. (해제: 신혜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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